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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사라진 세종 태실, 반 세기 만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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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부 박철희
PCH@tbc.co.kr
2024년 01월 23일

[앵커]
옛날 왕실에 자손이 태어난 뒤
아기의 태를 봉안하는 곳을 '태실'이라고 합니다.

태실 문화는 생명을 존중하는 우리 고유의 전통입니다.

그런데 반세기 전 사라졌던 세종대왕 태실의
핵심 유물이 국립박물관 마당에서 발견됐습니다.

박철희 기자의 단독보돕니다.

[기자]
성주 선석산 줄기가 뻗어내려
인촌지를 만난 곳에 아담한 봉우리가 섰습니다.

풍수지리에서는 땅의 기운이 솟았다고 해서
돌출된 혈 이른바‘돌혈’이라 부르는 지형입니다.

봉우리 이름은 태봉, 꼭대기엔
세종대왕자 태실이 자리했습니다.

훗날 세조가 된 진양대군을 비롯해 세종의 아들 18명과 맏손자 단종의 태실이 한데 모인
국내 최대 규모 태실 유적입니다.

[박재관 / 성주군 학예연구사]
“태실을 조성하기 위해 백성들이 노역에 많이 동원되고 또 (안태사 일행이) 서울에서 태실까지 내려오면서 백성들에게 피해를 많이 입혀요. 오히려 이렇게 한군데 (조성)한 부분에 (세종의) 애민정신이...”

왕실 자손이 태어나면 아기의 건강과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며 명당에 태를 묻고
태실을 조성했던 조선 왕실,

특히 세종은 왕으로 한정됐던 대상을
왕자로 확대하고 의례와 규범을 정비해
태실 체계를 확립한 군주입니다.

그렇다면 세종 자신의 태실은 어디 있을까?

경남 사천시의 큰태봉산, 이곳의 그늘진 산기슭에
몇몇 석물과 비석이 흩어져 있습니다.

당초 산 정상부에 있었지만 민묘에 자리를 내주고 이 곳으로 내려온 겁니다.

비석에 적힌 글로 이곳이 세종 태실지라는 걸
알 수 있을뿐, 아들의 태실이 모인 '국가 사적'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특히 부도탑처럼 생긴 핵심 석물인
중앙태석이 사라졌습니다.

[CG]
1967년 신라오악학술조사단이 현장에 흩어진
태실 석물을 수습해 촬영한 사진이
유일하게 남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최근 국립청주박물관 야외 전시장에서
세종 태실의 중앙 태석으로 보이는 유물이 발견됐습니다.

[CG 시작]
1967년 사진과 비교하니 형태가 마치 쌍둥이처럼 닮았습니다.

특히 사진과 같은 각도에서 촬영해 보니
지붕돌인 개첨석의 하단이 불규칙하게 치켜올라간 것과 보주를 받친 둥근 고리가
좌우로 기울어진 점까지 동일합니다.

받침돌 역할을 하는 사방석은 사라졌지만
몸돌인 중동석과 개첨석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CG 끝]

[CG]
1967년의 조사 기록처럼 물이 흘러내리는 낙수면은 8각으로 구성했고 2단의 둥근 고리 위로 연꽃봉오리 모양 보주를 얹어
빼어난 조형미를 자랑합니다.

[김회정 /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 박사]
“조선왕실 태실 문화에 있어서 초기 단계의 중요한 사례가 발견됐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세종 태실은 고 이건희 회장
기증 유물에 포함돼 국가로 넘어왔는데
태실 주인을 모른 채 청주박물관에 머무르던 걸 최근 심현용 한국태실연구소장이 찾아냈습니다.

[심현용 / 한국태실연구소장(울진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장)]
“똑같은 모양의 석조 유물(사진)이 인터넷 공간에서 돌아다니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다행히 분실이 안 되고 이렇게라도 찾아낸 건 다행이다...”

[스탠딩]
"태실은 뱃속 태아를 생명으로 존중해온 우리만의
문화유산입니다. 역대 어느 왕보다도 태실을
소중히 여겼던 세종대왕의 태실이
반세기 만에 우리 앞에 돌아왔습니다.
TBC 박철흽니다." (영상취재 이상호, CG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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