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삼국시대 이후 천5백 년째 쓰고 있는 저수지,
영천 청제를 조명하는 연속 기획 세번째 순섭니다.
오늘은 청제 역사를 고스란히 기록한
청제비의 비밀을 박철희 기자가 알려드립니다.
[기자]
민둥산 사이 물을 품은 저수지, 청제 아래로 비석이 보입니다.
신라 청제비와 조선시대 청제중립비입니다.
1968년 신라 삼산 학술조사단이 청제비의 존재를
학계에 처음 보고했고 이듬해 보물로 지정됐습니다.
비석 앞뒤로 536년 준공 기록과
798년 수리 기록을 새긴 청제비는
고대 저수지와 당대 비석이 함께 있는
동아시아 유일한 사롑니다.
그렇다면 청제를 만든 6세기 전반은
어떤 시대였을까?
[CG 시작]
"법흥왕 18년인 531년,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
삼국사기의 한 구절로 청제 건립 5년 전 이야깁니다.
소를 경작에 이용하고 순장을 금지해
노동력을 확보하는 한편 저수지를 만들어
농업에 총력을 쏟던 시기로 청제 역시 이 왕명에 따라 건립됐을 것으로 보입니다. [CG 끝]
청제를 만들고 보수한 536년과 798년, 그리고 청제중립비를 세운 1688년의 공통 분모는
기후 변화의 시댑니다.
[CG 시작]
삼국사기에는 786년부터 798년 사이 가뭄과 기근, 홍수 기사가 7건이나 나오는데 역병이 돌고 민생이 추락한 이 시기가 결국 만4천 명을 동원해 청제를 대대적으로 수리한 배경으로 풀이됩니다.
김재홍 국민대 교수가 문헌사료를 분석한 결과 1세기에서 10세기 사이 가뭄과 홍수 기록 95건
가운데 청제 축조 직전 5세기와 수리 전후인
8,9세기에 절반 가까운 44건이 집중됐습니다. [CG 끝]
청제중립비를 세운 1688년은 세계적인
소빙하기 속에 냉해와 가뭄, 한파가 덮친 대기근의 시대였습니다.
청제를 만들고 수리한 건 민생
회복을 위한 노력이었던 셈입니다.
[김재홍 /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교수]
“전 세계에서 일어났던 대기근의 시대를 알려주면서 그것을 영천이라는 지역에서 극복해내는 과정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게 중요합니다.”
청제비의 사료 가치도 높습니다.
[CG/T]
청제비 병진명에 나온 둑의 길이는 92심,
환산하면 184미텁니다.
[CG]
최근 정밀지표조사에서 첫 축조 당시 물넘이 공간으로 추정되는 여수로 흔적이 확인됐는데
이 곳을 기준으로 193미터, 가장자리 도랑을 빼면 천5백 년 전 기록인 184미터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만큼 청제비 내용이 정확하고
제방 또한 원형이 잘 보존됐다는 이야깁니다.
[김재홍 /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교수]
“치수를 정확하게 남기고 그 시기마다 비교할 수 있고 처음 만드는 데서 어떻게 증축했다는 것까지 알 수 있는, 토목공사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CG]
청제비 정원명 비문에는 중국의 한자체가 아닌
통일신라 사람들이 선호했다는 정감스런
글씨들도 나옵니다.
후대 역사서에서는 찾기 힘든
백성들의 삶이 녹아있는 겁니다.
[스탠딩]
"기후변화에 대처한 선조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천 청제, 또한번 기후위기를 맞닥뜨린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점을 던지고 있습니다.
tbc 박철흽니다." ( 영상취재 이상호 김도윤
CG 김유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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