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얼마 전 전해드린) 가야 최대 무덤, 금림왕릉은
일제의 엉터리 발굴로 무덤 구조조차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고령군이 대가야 실체 규명에 반드시 필요하다며
문화재청에 금림왕릉 재발굴을 건의했습니다.
박철희 기잡니다.
[기자]
문을 열기도 전에 긴 줄이 늘어선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가야관으로 들어가니 가야 대표 유물들이
자리했습니다.
금으로 치장한 환두대도와
용 문양을 새긴 금동제 화살통,
가야권 최대인 고령 지산동 5호분, 금림왕릉에서 나온 유물들로 대가야 공예기술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CG]
고리 안에 용을 단독으로 장식한 환두대도는
공주 무령왕릉과 경주 호우총 그리고 금림왕릉까지 지금껏 세 곳에서만 확인됐습니다.
[전효수 / 국립청주박물관 학예사 (2015년 금림왕릉 칼 분석.보존처리)]
“환(고리) 부분이라든지 손잡이 부분을 (도금이 아닌) 금판으로 장식하고 하나의 용만 조각한 건 지산동 39호분(금림왕릉 옛 명칭)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
[CG 시작]
고문헌에 나오는 대가야 왕은 시조 이진아시왕과 마지막 도설지왕, 가실왕과 하지왕, 이뇌왕 그리고
금림왕까지 모두 6명입니다.
하지만 금림왕은 천 년 뒤 조선시대 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만 나오는 만큼 실존 여부가 불투명합니다. [CG끝]
[CG]
1939년 금림왕릉을 발굴한 아리미쓰 교이치는
발굴 63년 뒤 펴낸 유고집에서 출토 토기 연대를 볼 때 무덤 주인이 522년 신라와 결혼동맹을 한 이뇌왕일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정동락 / 고령군 대가야박물관장]
“(지산동 고분군의) 대체적인 축조 순서가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오는 경향성이 있고 그러다보니까 고고학적인 양상으로 보면 6세기 초, 전반(에 축조된 게 분명합니다.)”
무덤 구조나 축조 방식도 오리무중입니다.
아리미쓰는 주석실과 소석실 1곳씩 조사했다고
유고집에 썼지만 정작 도면 1장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인근 44와 45호분에서 주곽 외에도 부곽과 순장곽 수십 기가 확인된 만큼 금림왕릉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큽니다.
[김세기 / 대구한의대 명예교수(1977년 지산동 45호분 발굴 참여)]
“(일제가) 완전 발굴을 한 게 아니기 때문에 (유물이) 많이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도 하고... 그것을 (재)발굴하는 거는 학술적으로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경주에서는 일제가 발굴한 고분들을
다시 발굴하는 작업이 활발한데 금관총 주인의 단서인 이사지왕 명문의 칼집 부속구가 새로 발견되는 등 성과도 잇따르고 있습니다.
[박천수 / 경북대박물관장]
"발굴의 손이 가해지지 않은 것이라면 (훼손 문제 등) 여러가지를 생각해 봐야겠지만 (금림왕릉은) 이미 (일제의) 조사에 의해 파괴가 상당히 행해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발굴하는 것이 오히려 구조를 밝히는 측면에서 필요하지 않을까...“
[CG/T]
고령군은 세계유산 등재를 기념해 내년부터 3년 간
국비 등 20억 원을 들여 금림왕릉을 재발굴 할 것을
문화재청에 건의했습니다.
꾸준히 조사를 벌이는 경남 함안과 창녕 등
다른 가야고분군 지역과 달리 지산동 고분군은 5년째 조사가 끊겼다는 점도 강조합니다.
[조백섭 / 고령군 문화유산과장]
“(지산동 고분군의) 봉토분 706기 중 14기만 발굴 조사되어 다른 고분군에 비해 조사가 많이 부족한 실정이며 지금까지 정책적 지원 및 관심이 많이 소외됐습니다."
[스탠딩]
"가야 최대 무덤 금림왕릉 재발굴로 천5백 년 전 가야의 비밀을 풀 열쇠가 나올지 벌써부터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TBC 박철흽니다." (영상취재 이상호 CG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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