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광복절 주간에 전할 또 하나의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국립대구박물관에 있는 정도사지 오층석탑인데요.
일제의 탐욕이 부른 이 탑의 긴 여정을
박철희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국립대구박물관 마당에 우뚝 선
보물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입니다.
지붕돌은 살짝 귀퉁이를 들어 맵시를 냈고
1층 몸돌엔 자물쇠를 단 문비를,
아래층 기단엔 꽃무늬 안상을 장식했습니다.
고려 전기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탑이지만
기단 한쪽에 숙연한 글을 새겼습니다.
[CG]
나라가 항상 평안하고 전쟁이 영원히 그치고
많은 곡식이 잘 여물기를 기원하며 탑을 세운다.
[CG]
탑 속 놋그릇에서 나온 2천여 자 기록 형지기는 약목군 향리와 백성들이 발원해 현종 때인 1019년부터 1031년까지 세웠다는 건립 경위를 담았습니다.
1019년은 거란과의 세 차례 전쟁이 귀주대첩으로 마무리된 햅니다.
[한길중 / 국립대구박물관 학예사]
"(전쟁) 이후에 평화가 더욱더 소중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국가가 평안하고 전쟁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과 염원들을 담아서..."
조성 목적과 시기,과정이 확인된 중요 문화재지만
지난 세기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CG]
칠곡 약목면 폐사지의 탑과 탑 속 유물을
경부선 공사 책임자 오야 곤페이가 1905년 이후 서울 용산 철도 관사로 무단 반출한 겁니다.
[이원희 / 칠곡군 약목면]
"(이웃 얘기가) 탑을 해체할 적에 자기 조부는 봤다 그거야. 한국 사람들은 접근 못하도록 해서 보물은 자기들이 가져가고 탑은 나중에 (가져갔다고 합니다)."
[CG]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 야쓰이 세이이쓰는 1909년과 1911년 오야의 관사에서 형지기와 탑을 잇따라 촬영해 조선고적도보에 실었습니다.
[CG]
정인성 영남대 교수는 야쓰이가 당시 도쿄에서 현상한 사진 원본과 이를 담은 봉투, 촬영 일지를 일본에서 입수해 공개했습니다.
[정인성 /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관사 뒤쪽의 야트막한 구릉이 있었다는 게 지도를 통해서 확인되거든요. 석탑은 아마 관사 뒤쪽에 있는 후원으로 조성되고 있던 숲 앞마당에...”
[CG]
오야의 약탈로 여론이 나빠지자
1924년 총독부는 경성철도국에 요청해
탑을 경복궁 내 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겼습니다.
70년 뒤 대구박물관 개관 때 탑은 대구로 왔지만 탑 속 유물은 여전히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습니다.
조성 경위를 새긴 기단돌은 서울 도심에 100년 넘게 서 있다 오염에 따른 손상으로 박물관 수장고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경복궁 시절 벌어진 6.25 전쟁으로 수십 곳 총상도 입었습니다.
긴 여정에 이젠 제자리가 어딘지도 희미합니다.
일부 주민은 선대 구전을 근거로 남계저수지 앞에 있던 작은 마을을 탑 자리로 지목합니다.
[이원희 / 칠곡군 약목면]
"마을 이름이 탑걸이라, 왜 탑걸이냐 하면 옛날에 오층석탑이 있었기 때문에..."
고려 때 주로 쓰인 비스듬한 격자무늬 기와 조각이
지금도 발견되는 곳으로 [CG] 철길에서 250미터 떨어진 만큼 철도 공사가 아닌 문화재 욕심으로 탑을 뜯었다는게 명백합니다.
[정인성 /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을 때 가장 가치가 있다 이런 이야기를 누구나 합니다만 어떤 경위를 거쳐서 제자리를 잃게 됐는지 (면밀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스탠딩]
"천 년 전 외세를 막으려 건립됐지만
또 다른 외세 일제에 혹독한 시련을 겪은
정도사지 오층석탑, 더 이상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라고 후세에 책무를 던지고 있습니다
TBC 박철흽니다." (영상취재 김도윤 CG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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