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순국선열과 전몰장병의 희생을 기리는
현충일을 맞아 120여 년 전, 항일 의병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소개합니다.
당시 의병들은 국가의 부름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총칼을 들고 일어섰지만
관련 기록물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합당한 보상조차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상혁 기자가 실태를 전해드립니다.
[기자]
1906년 영천에서 조직된
항일 의병부대인 산남의진.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을 맺은 뒤
중추원 의관인 정환직 선생이 고종으로부터 의병 봉기 밀지를 받고 아들과 함께 일으킨 부대입니다.
이 부대에서 활약한 의병 가운데 포상을 받은 인원은 전체의 4분의 1에 그칩니다.
산남의진기념사업회에서 파악한 참여 의병은 499명, 이 가운데 130여 명만 포상을 받았습니다.
산남의진 의병 김용본 선생 손자인 김상활 씨도
부친 때부터 포상을 받기 위해
자료를 모아 신청했지만 반려됐습니다.
산남의진 실제기록자료집인 산남창의지와
호적을 비교해 보니
같은 인물이 아니라는 이유에섭니다.
당시에는 호적에 등재된 이름 외에
의병운동 당시 통용되었던 이름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료집에는 이름이 김완서,
호적에는 이름이 김용본으로 되어 있어
다른 인물로 본 겁니다.
[김상활 / 산남의진 의병 김용본 선생 후손]
"반려가 되니까 황당하고 어떻게 (증명) 자료를 구해야 될지 참담한 심정입니다..."
종신형을 받은 대구의 항일 의병 김곤이 선생도
아직까지 포상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제가 작성한 판결문에는 김 씨가 일본군을 살해하고 금품을 갈취한 혐의라고 적혀 있지만
사실상 의병 자금을 모으기 위한 행위를 일제가 거짓 서술한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습니다.
[조충래 / 산남의진기념사업회 부회장]
"의병에 대한 탄압이 굉장히 심했거든요. 지역 사람들이 이르고 이랬단 말이죠. 내가 의병 했다 의병이었다라고도 못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자료들이 거의 없는 겁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던지며 희생한
항일 의병들의 숭고한 정신과 뜻을 기리는 일은 여전히 멀기만 한 현실입니다.
TBC 안상혁입니다.(영상취재 김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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