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문
- 정연복
- 0
- 413
- 글주소 복사
- 2004-07-07 00:26
호 소 문
시민 여러분, 저는(고정명화)의 아들(고정연관)의형 정연복입니다.
(고정연관)은 1987년12월4일 육군제8350부대에서 사망.
당시 12월5일 05시 군부대로부터 사망 전화를 받고, 군부대로 가니 정연관은 사망하였고, 군부대에서 주장한 사망원인은, (고참병 박재윤이
에이, 티, 티,(A.T.T) 훈련과, 정신상태 훈계하던 중, 가슴을 2회 구타, 뒤로 넘어지면서 관물대에, 머리가 받치어 사망하였다.)라고 주장 한 사건입니다.
당시 부대 사병의 말에 의하면(정연관은 만천하에 알려도 영광된 죽음이다, 정연관 이를 죽인 자들 실탄이있엇으면 전부 죽이고십은 심정 이였다) 죽음에 의혹을 가진 유족의 심정 비통했습니다.
비통한 심정으로, 자식 또는 동생을, 군부대의 절차에 따라 화장하고, 봉한 소에 봉한 후 포항 집에 오니, 포항 오천에 있는, 보안 부대에서 유족의 대문 좌, 우측에 승용차 2대를 세워놋고, 밤낮주야로, 조문객의 진입을 저지 하는가하면, 당시 포항 대송 면사무소에, 대형 무전기를 설치하여 유족을 감시하고, 유족의집 전화를 도청 차단하는 등의 이상한 감시를 하며 유족을 분노하게 한 사건입니다.
이러한 과정에 정연복 본인은 김요한 (서울도봉구)과 함께, 서울 카톨릭 천주교 인권위원 에서 기자회견을 하였고, 군부대에 찾아가 재조사 요구하였고, 군부대는 사건 진실을 숨기기에 급급하였고, 진실을 알지 못한 유족은 참담한 심정으로 각 제야단체, 민가협, 유가협, 당시 각 정당에 호소하였습니다.
이 과정에 서울, 거제도, 인천. 대구, 등 여러 곳에 당시 부대 전역 인을 찾아다니면서 진실을 조사하였고, 이 과정에 정명화의 아들 정연관은 1987년 12월 4일 군 부재자 투표에서 기호 1번 노태우 후보를 찍으라고 강요하였으나 정연관은 518광주 민주화운동 비디오를 군입대 전 계명대학교 동아리에서 광주 518 사건은 너무나 참혹한 사건을 시청하였고 국민으로 용납할 수 없는 사건들을 시청하였기에 그로 인해 정연관은 기호 3번 김대중 후보에게 기표하였고, 기표 후 봉투를 봉하려 하였으나 봉함 풀이 없어 봉하지 못한 사실로 중대장이 그 봉투를 확인 후, 고참병에게 야당을 기표한 사실을 나무랐고, 그로 인해 고참병들이 정연관 외 9병을 침상에 세워놓고 구타 중 사망한 사건임을 알게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가로부터 가족 피해보상 청구 후 지방 법원에서 승소 고등법원에서 승소 후 가집행 금액을 가 집행하여 모두사용하고, 모자라서 선친 묘답마저 팔아 모두 탕진한 정명화, 저의 부친은 이곳 저곳 정신없이 다닐 수밖에 없었던 심정은 비명에 자식 잃고, 형제를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생각합니다.
시민 여러분 자식 잃은 부모심정, 가슴에 칼을 꽂는 고통 보다 더 하리라 생각합니다.
아버님 생전에 지켜온 묘답을 잃고, 근근히 마련한 자신이 몸담은 큰자식 집이 국가에 가압류되었고, 둘째 자식 아파트 집이 국가에 가압류되었고, 아버님 명해 만 된 문중산마저 국가에 가압류되었고, 가압류 소송에서, 1차에 승소, 다시 패소, 등 소름 끼친 국가의 장난에, 결국 아버님은 2000년6월 뇌출혈로 3년을 식물인간으로 투병하시다가, 2003년6월13일 운명하신 사실은,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에, 아버님 자식을 빼앗기고, 재산과 금전, 그리고 아버님 육신 마저 빼앗아간 국가에 저 정연복은 울며 분노합니다.
이제 저마저 상속인으로 지목하여 죽이려 하는 파렴치한 이 국가에 작은 등불처럼 시민여러분의 작은 희망이나마 부탁을 올립니다.
저희 유족들을 다시 한번 보살펴 주시길 간곡히 부탁하며 저희들의 어려운 사정을 시민 여러분의 현명한 판단으로 제3 유족을 보살펴 주시길 바랍니다.
전국에 계신 시민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포항에서
정연복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