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못의 기원(起源)

  • 최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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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07 19:54
오랫동안 대구 수성못 기원(起源)에 관하여 논란이 있었다. 그 논란의 하나는 수성못이 기존에 있던 못으로써 증축이 되었다는 주장과 다른 하나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일본인 ‘린타로’의 공로로 신설되었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수성못의 관할구청인 수성구청(壽城區廳)이 논란의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모 스토리텔링연구원에 용역을 주어 그 논란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 용역 보고서의 결론은 “수성못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의 공로로 신설된 못이다.”이었다.

필자는 보고서를 살펴보면서 정말로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그 중요한 사항을 “그렇게 부족한 자료를 가지고 그렇게 졸속으로 처리하다니” 하는 것이었다. 보고서에 결론 근거 자료로 든 것은 고작 몇 가지뿐이었다. 수성못이 조선시대 둔동제(屯洞堤)를 확장했다는 결정적인 자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잘못된 보고서를 만든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보고서가 “수성못 역사 왜곡”이란 쇠말뚝을 박은 것이다.

대구 저수지 기록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아주 많이 자료들이 남아있다. 왜냐하면 농자(農者)가 근본인 세상에서 저수지는 백성의 생명수(生命水)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논 물꼬싸움으로 칼부림이 일어나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래서 역대 대부분의 지리서(地理書)는 저수지를 상세하게 기록하고자하였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도 『대구읍지』 『대구부사』 『달성군지』 등에도 저수지에 관한 기록들이 남겼다.

수성못의 옛 이름인 둔동제는 신라시대에는 불체지(佛體池)라 명명(命名)하였다. 불체지는 고운 최치원이 쓴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登樓記)에 나온다. 불제지라는 이름은 불교적이라는 이유로 고려시대에 배척되어 둔동제가 된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일제강점기에 둔동제는 가창댐이 건설되면서 일시적으로 논으로 사용되다가 ‘수성수리조합’이 결성되어 확장되어서 수성수리조합저수지로 불리어지기도 했다.

대구의 문화유산인 수성못의 기원을 왜곡(歪曲)하고, 조선을 강제로 점령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을 우상화(偶像化)하는 웃지 못 할 보고서가 나를 슬프게 한다. 수성못은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지나 현재까지 대구시민 곁에 존재하는 대구시민의 자랑이자 대구시민의 자존심이다. 하루빨리 “대구 수성못 역사왜곡 쇠말뚝”을 뽑아 대구의 정기를 되살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