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통 토크쇼\' 대구시설공단 김석동본부장님 강연자 추천

  • 추현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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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16 17:52
안녕하십니까?
현재 영남대학병원에 근무하며 매일경제 칼럼과 서울 한국투데이 기자를 하고 있는 추현헤라고합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인터뷰 취재를 하다가 너무도 귀감이 되기에 이런 훌륭한 분들을 알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여 봅니다^^
작가님께서 한번 읽어 보십시요!!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며 대구는 좁지 않는지요..
주변에서 평판 또한 대단합니다.
이런 분들을 방송에 출연시켜서 주신다면 대구시민들에게 희망을 줄 듯 합니다^^
감사드립니다^^


<한국투데이 인터뷰 기사입니다>

인생 3모작, 드라마 인생의 주인공 대구시설관리공단 본부장 김석동

대구시의 ‘담장 허물기’ 시민운동, 민선 6기 시정의 창의·혁신 아이콘, SNS의 시정 홍보와 시민단체와의 소통 아이콘으로 대구 공무원계의 기획 핵폭탄이었던 김석동 본부장. 철공소에 근무하며 검정고시를 통해 인생 2모작 공직생활을 시작하고 38년의 성공적인 공직생활로 마침표를 찍은 후 또 다른 인생 3모작을 도전하여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는 드라마 인생의 주인공 대구시설관리공단 김석동 본부장을 만나 보았다.

Q. 본부장님 남다른 어린 시절로 검정고시를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많이도 힘드셨을 텐데.. 어려운 환경에서 어떻게 공부를 하였는지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우리 세대는 대부분 어렵게 공부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 또한 가난한 빈농의 육 남매 막내로 태어났으며 제 나이 다섯 살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맏형의 나이는 불과 15살 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선장 없는 낡은 배에 승선한 경우와 같은 이치라 할까요? 공부는 시골학교에서 잘하는 편이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남들보다 일주일 늦게 중학교에 입학해 3학년 1학기까지 다니다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결국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를 중퇴한 후 7월 자그마한 가내공업 공장에 월 6천 원, 숙식제공의 조건으로 취직을 했는데 막내다 보니 어머니가 보고 싶어 남몰래 많이 울었습니다. 이후 시골 농사를 도우다 이듬해 중학교를 졸업한 고향 친구들과 북구 침산동 제3공단에 있는 ‘오무전기’라는 모터 공장에 취직을 했고, 기숙사에서 비 오는 날 연탄가스 중독사고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빨리 기술을 배워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철공소에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철공소 사장님이 경북대학교에 다니다가 선친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가업을 물려받으신 분이셨는데.. 그곳에서 일이 바쁠때는 최고 36시간 연장 근무를 하는 등 성실성을 인정받아 사장님으로부터 공부를 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을 받게 됩니다. 개인 철공소에 퇴근시간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이어서 정시에 퇴근시켜 주시면 공부를 해 보겠다고 하고 1978년 9월부터 낮에는 철공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는 주경야독을 생활을 하여 1979년 4월에 치러진 중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에서 전 과목을 합격하고 같은 해 1979년 8월에 고등학교 졸업 자격 검정고시에서 다시 전 과목 합격이라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주경야독이라 늘 잠이 부족하다 보니 철공소에 일을 하면서 졸다가 기계와 용접 불똥에 다친 크고 작은 상처들이 온몸에 아물 날이 없었지만, 1년 후인 1980년 9월에 대구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만38년 7개월 동안 대구시 공무원으로 재직하게 되었습니다.

Q. 사실, 철공소는 기술을 필요로 하지만 공직생활은 행정인데 전혀 다른 직업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업무능력은 어떻게 키우셨는지요? 그리고 주변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만약 그러하셨다면 어떻게 어려움을 이겨내셨는지요?

1980년 10월에 처음으로 공직에 입문해서 동사무소 에서 처음으로 공무원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동사무소의 모든 문서는 수기로 해야 하고 사용하는 활자도 거의 대부분이 한자였습니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 철공소에서 선반으로 제품을 깎고 전기용접을 하던 손으로 한자를 쓴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글자를 쓴 게 아니라 한자를 그린다는 표현이 맞겠지요. 그것도 아주 그림을 못 그리는 그림 말입니다. 글자를 예쁘게 쓸 줄 모르니 선배들과 동장님으로부터 많은 눈총을 받았지요. 그분들이 보시기에 저는 애물단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절치부심했습니다. 펜 글씨본을 사서 한자 쓰는 법을 익히고 모르는 것을 부끄럽지 여기지 않고 누구에게나 물어보고 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주경야독을 하던 그 마음으로 당직 같은 궂은일은 도맡아 하는 등 누구보다 열심히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수개월이 지나고 나니 저의 그런 마음을 알아주고 실력을 인정해 주는 등 서서히 공직에 적응하게 되었습니다.

Q. 이러한 어려움을 모두 이겨내셔서 지금 인생 3모작을 이루셨는데 남다른 철학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어떠한 철학과 신조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한국의 조직사회는 공직뿐만 아니라 일반 회사에 이르기까지 학연과 지연, 혈연 등 세 가지 인연이 조직생활에 알게 모르게 많은 작용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요즘은 많이 희석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이 세 가지 인연이 조직의 승진과 인사 등에 많은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는 검정고시 출신이자 고향이 대구여서 조직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학연과 지연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 핸디캡을 극복하는 방법은 남보다 한발 앞서 생각하고 업무를 능동적으로 처리해서 조직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등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면 된다’ 긍정적인 생각과 ‘할 수 있다’는 열정을 바탕으로 업무를 진행하면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마음속으로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주문을 외우면서 스스로에게 최면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이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다고 답하라 그리곤 그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알아내려 최선을 다하라’는 미국 제26대 대통령인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명언을 생활신조로 해서 공직생활을 이끌어 왔습니다.

Q. 약 40여 년 동안 공직생활을 하면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업무 추진으로 언론의 많은 조명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 구체적인 업적을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크게 자랑할만한 업적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내용입니다. 공직자라면 제가 아니라도 누군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서 몇 가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993년 동구청에서 근무할 때 일화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행정기관이 대단히 권위적이어서 행정기관의 사무실을 무료로 쓴다고 생각하는 게 대단히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회의실을 무료 개방해 시민들이 무료 예식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제안을 하고 직접 무료예식장을 운영을 해서 언론의 대대적인 호평을 받은 바 있습니다. 또한 1999년 5월 시에서 근무하면서 ‘담장 허물기’ 시민운동을 제안해 담장을 허물고 그 자리에 녹지공간으로 조성하는 시민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해서 지금까지 그 운동이 계속되고 있으며, 대구 시민운동의 대표적인 브랜드 사업이 되었습니다. 도심의 담장을 허물고 녹지공간을 조성하는 사례는 도심공간 재생 차원에서 모든 언론과 지자체에 크게 주목을 받아 전국의 모든 도시에서 벤치마킹을 해 가는 것은 물론, 심지어 일본의 고등학교 교과서에 이 사례가 소개된 적도 있습니다.
또한 2003년 하계U대회와 2011세계 육상 선수권대회 성공 개최의 밑바탕이 된 시민 서포터스를 총괄 운영하고, 대회 지원을 위한 페이스북 서포터스 그룹을 만들어 미국과 실론 교포를 통해 교포신문과 현지 언론에 대회 홍보기사와 칼럼이 게재되도록 한 바, 지역 매일신문에 저의 활동 사례를 소개한 바보 Korea, Viva DaeGu라는 칼럼이 게재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Post2011사업의 일환으로 2011대회시 서포터스 활동에 사용했던 T 셔츠와 응원한 나라의 국기 등을 수거해 영국, 스리랑카 등 해당국 교포들에게 자비로 보내서 교포들의 사업 이벤트와 자긍심을 높이는데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국제 마라톤 응원장을 축제장으로 만들고, 민선 6기 시정의 가장 혁신적인 사업으로 평가받고 있는 현장소통 시장실을 기획&#65381;운영하였습니다. 종전에는 마라톤 응원시 구&#65381;군별로 구간을 정해 주고, 시민을 동원해 응원하도록 하던 것을 응원에 참가할 공연팀과 응원팀을 공개모집해 주요 지점에 배치하고, 자발적으로 응원과 공연에 참여하도록 해서 시민들이 마라톤 축제를 즐기도록 하였습니다.

Q. 본부장님께서 제안한 현장소통 시장실이 무엇인지요? 왜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라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도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2014년 7월에 민선 6대 대구광역시장 체제가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당선되신 시장님께서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셨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민원 현장에서 시민들과 민원 문제 해결을 위한 직접 대화를 통해 시민들의 마음속으로 다가가자는 전략을 마련한 것이 바로 현장소통 시장실이었습니다. 과거에도 이러한 현장 대화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대부분 시나리오를 미리 만들어서 그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현장 대화였다면, 민선 6기의 현장소통 시장실은 격식을 파괴한 현장대화였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 주된 내용을 말씀드리면 첫째, 형식의 파괴입니다.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천막을 쳐서 현장감을 살리는 것은 물론, 사전에 어떠한 질문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있는 내용의 혁신이었습니다. 약 2시간을 계획해서 대화를 진행했으나 더 대화하기를 원하는 시민이 있으면 최후의 1인까지 들어 주는 시간의 파괴였습니다. 제가 업무를 담당하는 동안 46회를 운영하여 172건의 현장민원을 처리하는 등 민선 6기 초기 시정의 연착륙을 이끌어낸 대표적인 혁신사업이었으며, 각종언론에서 각본 없는 드라마를 연출했다는 극찬을 받은 바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산이 넉넉지 않다 보니 직원들이 천막을 치고 의자를 나르고 온갖 노동을 하는 것은 물론, 적은 예산으로 빌려온 앰프는 수시로 고장 나서 진땀을 흘리게 했고, 진행과정에 수십 년간 그린벨트 민원 해결을 위해 시장 면담을 요청했으나 한 번도 성사되지 않았는데 현장에서 만나 대화할 날이 올지 몰랐다며 눈물을 흘리는 시민을 보면서 몸과 마음은 고달파도 이런 사업을 잘 마련했다는 자긍심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Q. 대구지역 공동체를 위한 사회봉사에서도 앞장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사회봉사 말씀을 하시니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공직자라면 누구나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1992년 공직사회에 처음으로 매월 1일 급량비 5만 원을 지급했습니다. 그해 4월부터 저는 동료들이랑 매월 각 2만 원을 모아서 우리보다 어려운 이웃을 정해 지원하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조건은 수혜를 입은 당사자들이 지원자를 모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30여 명이 참여했으나 지금까지 이 일에 참여하는 사람은 저를 제외하고, 단 1명에 불과하고, 적은 액수이지만 27년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는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십자사와 이웃 돕기 공동모금회 등 봉사 단체와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등 비영리단체 12개 단체에 매년 160만 원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후배 공무원들에게 보고서 작성 요령 등에 대한 강의와 제 인생 스토리를 토대로 시민단체 종무식과 용학 도서관의&#65378;사람책방&#65379;프로그램에 무료로 재능기부 강의를 하였습니다. 특히, 대구핸드볼협회 홍보이사로 자원봉사를 시작하여 페이스북이나 언론 홍보를 주도하고, 수많은 단체와 페이스북 등을 통해 맺어놓은 SNS 네트워크를 활용해 경기 관람과 참여를 유도해서 50~60여 명에 불과하던 리그 경기 참여 관중을 만석으로 채우는 획기적인 성과도 이루었습니다. 또한, 페이스북, 카카오톡 등 SNS를 통해 스스로 시민의 심부름꾼임을 자처하고, 제 업무와 관련이 없어도 시민이 궁금해하거나 애로사항을 얘기하면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미국 교포가 방학기간에 자녀들을 대동해 친정에 거주하면서 초등학교에 자녀들의 청강을 요청했는데, 해당 학교와 교육지원청에서 전례가 없다면서 허락하지 않았다는 민원을 접하고, 시 교육청과 협의해서 청강할 수 있도록 해결하자 미국 현지 교포께서 감사하다는 국제전화를 해 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성들로만 구성된 봉사단체인 대명 라이온스클럽에서 북한이탈주민 8쌍 합동결혼식을 추진하면서 제주 신혼여행에 필요한 경비, 8백만 원을 지원해 달라는 민원을 접하고, 평소에 네트워크를 맺고 있는 봉사 단체에 도움을 청하고, 지인들과 어려운 이웃 지원을 위해 모으고 있던 자금 등 650만 원을 지원하기도 하였으며, 이외에도 자잘한 심부름 같은 일은 수시로 처리하기도 하였습니다.

Q. 인생 3모작의 시작인 ‘대구시설공단 본부장’으로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축하와 성원의 말씀 감사합니다. 대구시설공단은 수영장 3개, 사격장, 승마장 등 각종 체육시설과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 등 도심공원 3개소, 지하상가, 공영주차장, 20m 이상 도로와 가로등을 관리하고 명복공원과 콘서트 하우스 등 문화복지시설을 운영하는 대시민 서비스 공기업입니다. 시민 접점에 있는 시설을 관리 운영하는 공기업의 특성을 살려서 안전과 청렴 우선의 경영을 통해 시민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2년 연속 부패 방지 평가 1위, 공기업 경영 평가 전국 2위 달성을 바탕으로 더욱 낮고 겸허한 자세로 서번트 리더십을 발휘해 조직 내부의 혁신과 신바람 나는 직장 분위기를 조성해 나가고자 합니다. 특히, 수영장 이용 등이 시민들의 건강을 증진시킴으로써 의료비가 절감되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듯 대구시설공단이 운영하는 모든 시설의 운영을 단순히 시설을 유지 관리하는 차원을 넘어 수영장 이용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는 등 시민들의 간접 복지를 증진할 수 있도록 시설물 관리의 패러다임을 전환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친환경적인 시설물 유지 관리를 위해 관리하는 수목을 바코드화해서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빗물 저금통과 태양광 발전 시설 늘려 나가는 한편, 본격적인 사물인터넷 시대를 대비해 직원들의 업무 역량을 높여 나가겠습니다.

Q. 마지막으로 서울 ‘한국 투데이’는 ‘도전하는 사람들을 위한 신문’이며 지방보다는 서울에서 많이 알려져 있고 젊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지요?

한국 투데이는 지난 2011년 4월에 창간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전하는 한국의 오늘을 알리는 신문! 당신의 도전과 함께 합니다’라는 슬로건이 말해 주듯이 짧은 역사지만 젊고 역동적인 힘이 느껴집니다! 국가의 존립과 발전된 미래를 위해 치우침이 없는 중용의 도와 정론 직필하는 젊은 신문으로 거듭나시기 바랍니다. 특히, 기성세대와 젊은이들간에 갈등과 대립이 아니라 기성세대의 공과를 정확히 해서 젊은이들이 수용하고, 서로 소통 공감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앞장서는 언론이 되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한국 투데이의 융성과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무한도전과 열정 그리고 진솔함. 한편의 논픽션 드라마를 보는 듯한 김석동 본부장의 인터뷰는 ‘삶의 교향악’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언젠가 표창장에 쓰인 “투철한 사명감으로 맡은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지역사회와의 헌신적인 봉사, 시정발전에 남다른 노력과 정직한 공무원으로서 청렴하고 근면 성실한 자세로 최선을 다하는 모범생활로 주위로부터 신뢰가 타의 귀감을 사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은 진부한 포장 언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잘못된 생각을 단번에 바꾼 진정한 주인공이다.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적인 인생 2모작의 마무리와 인생 3모작의 도전 자체만으로도 훌륭하지만 합리적이고 온화한 성품과 창의적이며 치밀한 업무역량, 컨버전스와 거버넌스 행정력을 갖춘 김석동 본부장. 앞으로 대구시 시설관리공단의 발전과 대구 시민의 행복 미소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