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총탄생지 반룡사(盤龍寺)를 가다

  • 윤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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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1-25 15:43
설총탄생지 반룡사(盤龍寺)를 가다

설총탄생지((薛聰誕生地) 반룡사(盤龍寺)는 신라문무왕(文武王 : 661-680)때 경북 경산시 압량면 출신 원효대사(元暁大師 : 617-686)가 창건한 대가람으로써 신라왕실의 기원사찰(祈願寺刹)이었다. 특히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딸인 요석공주(瑤石公主)와 손자인 설총(薛聰)을 만나기 위해 넘어온 고개라 하여 지금도 왕재라고 불리고 있다.

설총(薛聰)을 간단히 소개하면, 신라 경덕왕 때 대학자로 자는 총지(聰智), 호는 수월당(水月堂), 할아버지는 나마(奈麻) 담날(談捺), 아버지는 원효대사(元曉大師),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6두품출신으로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고, 신라십현(新羅十賢)의 한 사람이다. 《증보문헌비고》에 경주설씨(慶州薛氏)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설총(薛聰)은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았고, 경사(經史)에 통달하였으며 우리말인 신라언어로 구경(九經)을 읽고 후생을 가르쳐 유학(儒學)의 종주(宗主)가 되었다. 강수(强首), 최치원(崔致遠) 등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新羅三文章)로 꼽혔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 제6에는 설총(薛聰)이 신문왕의 요청으로 우화(花王戒 또는 諷王書라고 함)를 지어 들려준 기사가 나오는데, 이 우화(寓話)는 국왕에게 아첨하는 여인의 애교보다 정직한 신하의 충고에 귀를 기울일 것을 권하는 내용으로, 통일신라(新羅時代)의 전제정치(專制政治)하에서 유교적(儒敎的)인 도덕정치(道德政治)의 이념을 주창(主唱)한 것이다.

설총(薛聰)은 자신의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왕의 총애와 신임을 얻음으로써 신분적 한계 속에서도 어느 정도의 정치적 진출을 이루었다. 682년(신문왕 2년) 국학(國學)의 장인 경(卿)이 설치됨으로써 국학이 교육기관으로서의 정식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설총(薛聰)은 이러한 국학의 설립과 교육에도 크게 공헌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구경(九經)을 우리말(方言)로 학생들에게 강론하여 유학발전(儒學發展)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중국문자에 토를 다는 방법을 고안해 당시 중국학문의 섭취에 도움을 주었다. 후세에 이르러, 특히 고려말기에서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설총(薛聰)이 우리말로 경서(經書)를 읽는 방법을 발견했다 하여 이를 이두(吏讀)의 창제로 보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이두(吏讀)로 쓴 기록이 이미 그 이전부터 나타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설총(薛聰)은 이때 이두(吏讀)를 창제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리, 집대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글을 잘 지었다고 하나, 《삼국사기(三國史記)》편찬 당시의 글자가 결락(缺落)된 비명(碑銘) 몇 점 외에는 전하지 않는다. 719년(성덕왕 18년)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를 지었으며 말년에 《설총비결(薛聰秘訣)》이라는 비결서를 남겼다. 고려시대인 1022년(현종 13년) 홍유후(弘儒侯)에 추봉되었다. 문묘에 배향됨과 동시에 경북 경주시 서악서원(西岳書院)에 제향되었다.

우리의 정신적 뿌리인 천년고찰(千年古刹) 반룡사(盤龍寺)의 정확한 위치는 경북 경산시 용성면 용전리 118번지일대 구룡산(九龍山)자락에 있으며, 한국의 3대 반룡사(盤龍寺 : 경산, 고령, 평양) 가운데 하나인 이름난 사찰로서 옛날에는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관음기도 영험도량이었다. 설총(薛聰)은 우리민족의 최초의 글인 이두문자(吏讀文字 : 一名 鄕札이라고도 함)를 집대성한 민족문화의 큰 스승이다.

고려시대에는 화엄천태종 고승(高僧) 원응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11대문종(文宗 1047-1081)때 대중수(大重修)를 하여 명실공히 고승대덕(高僧大徳)이 구름처럼 모이고 석학(碩学), 명사(名士)들도 줄을 이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 석학 이인로(李仁老)도 설총탄생지(薛聰誕生地) 반룡사(盤龍寺)를 찾아 감회어린 시(詩)를 남긴 바가 있다.

고려말기 몽고의 난과 조선중기 임진왜란(1592년) 등으로 웅장한 대가람이 거의 다 소실(焼失)되고 말았다. 조선 인조19년(1641년) 계운(戒云), 명언(明彦)대사가 대중창(大重創)을 하였으며 속암인 내원암(内院庵), 벽운암(碧雲庵), 대적암(大寂庵), 은선암(隠仙庵), 안적암(安寂庵) 등 다섯 암자(庵子)도 중창(重創) 또는 창건(創建)되었으나 조선말기 혹독한 억불정책(抑佛政策)으로 일백여동(一百余棟)의 당우(堂宇)가 겨우 몇 채만 남게 되었는데, 이 것 마저도 80여 년 전 큰 화재로 모두 소실(焼失)되고 말았다. 지금의 초라한 대웅전과 요사채는 몇 안 되는 신도들의 발원(発願)과 신심(信心)으로 겨우 명맥만 유지한 상태다.

특히 삼존불 가운데 목조관세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은 화재이후 경북 청도군의 모 사찰에 옮겨져 보관중이며, 범종 또한 경북 포항시 보경사에 있다. 그리고 1991년 10월에는 아미타불마저 도난당해 지금도 찾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삼국통일(三國統一)의 염원(念願)을 기도로 성취하기도 했던 천년고찰(千年古刹) 반룡사(盤龍寺)는 수많은 역사의 굴곡과 아픔을 간직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민국에는 국보급사찰이 전국에 많이 산재해 있지만, 설총탄생지((薛聰誕生地) 반룡사(盤龍寺)처럼 우리민족의 역사(歷史)와 정체성(正體性)을 고스란히 간직한 사찰(寺刹)도 보기 드물다.

이런 와중에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경북 경산시 출신 원효, 설총, 일연선사 3명의 성현(聖賢)을 기르기 위해 2008년 하반기부터 경북 경산시 남산면 안흥리 일원(26만 4000㎡)에 역사문화공간(歷史文化空間)을 본격적으로 조성한다고 한다.

삼성현공원(三聖賢公園)에는 경산에서 출생하거나 자란 삼성현(三聖賢)의 생애와 학문, 사상을 재조명하기 위한 역사문화관을 비롯해 ▲유물전시관 ▲원효·설총·일연각 ▲삼성현 정원 ▲국궁장 ▲산책로 ▲분수광장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와 더불어 삼성현공원조성사업(三聖賢公園造成事業)을 통해 삼성현(三聖賢)의 고장인 경산(慶山)을 우리민족정신문화의 산교육장으로 적극 활용하려는 강한 의지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아주 훌륭한 착상으로 생각하며, 또한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축하하고 싶다.

그러나 이렇게 훌륭한 정책을 입안해 삼성현공원조성사업(三聖賢公園造成事業)을 추진하면서 원효대사(元暁大師)가 창건하고 설총(薛聰)이 태어나 자란 천년고찰(千年古刹) 반룡사(盤龍寺)의 국가적인 복원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이 빠져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아쉬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삼성현공원(三聖賢公園)을 조성하면서 말 못할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설총탄생지((薛聰誕生地) 반룡사복원사업(盤龍寺復元事業)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대책을 수립해 능동적이면서 적극적인 지혜를 모을 때임을 우리 모두 명심했으면 좋겠다.

21세기의 화두(話頭)로 세계석학(世界碩學)들이 전통문화(傳統文化)가 그 나라의 경쟁력(競爭力)임을 하루가 멀다 하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의 지도자와 우리의 국민들은 맹목적으로 서양문물(西洋文物)에 현혹되어 우리의 뿌리인 전통문화재(傳統文化財)의 소중함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물질만능(物質萬能)과 피폐한 정신세계(精神世界)로 인해 이미 몰락의 길로 접어든 서양의 가치기준(價値基準)을 대체할 유일한 대안(代案)이 바로 동양철학(東洋哲學)과 동양문물(東洋文物)임을 서양의 석학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런 점을 우리의 지도자와 우리국민들은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지혜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지금 우리의 젊은이들은 정체성혼란(正體性混亂)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國外)에까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문제점을 발생시켜 외교적 마찰까지 불러오고 있다. 특히 해외영주권불법취득으로 국방의무(國防義務)마저 회피하려는 풍조(風潮)가 우리사회에 만연(蔓延)해 있다. 정체성확립문제(正體性確立問題)는 시급하며 오로지 정부당국자, 교육당국자들의 몫만은 아니다. 사회지도층인사, 다양한 종교지도자 그리고 일반소시민들까지 모두 책임이 있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학교나 사회단체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부분을 수천 년 면면히 이어온 우리의 전통문화(傳統文化)요 우리의 뿌리인 전통고찰(傳統古刹)을 삶의 근원으로, 지역특화의 계기로 삼아 지역주민들에게는 소득의 증대로, 도시민들에게는 재충전의 시간으로, 그리고 우리의 2세들에게는 우리의 역사(歷史)와 전통(傳統)을 배우는 훌륭한 교육의 장으로 잘 활용한다면, 팍팍한 우리의 삶과 생활의 지혜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서 꼭 첨언하고 싶은 것은 바로 우리의 뿌리요. 우리의 정신(精神)이요, 우리의 역사(歷史)인 전통고찰(傳統古刹)에 대한 복원(復元)과 보존문제(保存問題)이다. 나는 틈이 날 때마다 전통고찰(傳統古刹)에 자주 들리는 편인데, 갈 때마다 아쉬운 점은 재정적 지원이 미흡해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文化財)가 아무렇게 여기저기 내팽개쳐 있고, 또한 우리의 뿌리요 역사(歷史)인 고찰(古刹)들마저도 하나 둘씩 허물어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석가래가 썩어가고, 기왓장이 내려앉고, 단청(丹靑)마저도 낡아 속살을 드러내고 있음을 볼 때, 우리 모두가 문화재(文化財)에 대한 애착과 소중함을 갖고는 있는지 의심이들 때가 참 많았다. 고로 우리의 문화재(文化財)가 바로 우리의 역사(歷史)요, 우리의 전통(傳統)이요, 우리의 정체성(正體性)임을 다시 한 번 가다듬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고대해본다.

천년고찰(千年古刹) 반룡사(盤龍寺)는 우리의 선조들의 땀과 혼이 고스란히 담긴 곳으로 고려말기 몽고의 난과 조선중기 임진왜란(1592년) 등으로 웅장한 대가람이 거의 다 소실(焼失)되기 전까지는 당우(堂宇)가 일백여동(一百余棟)이나 되는 큰 寺刹이었다. 아마도 경주의 불국사나 합천의 해인사에 버금가는 우리나라호국불교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소중한 천년고찰(千年古刹) 반룡사(盤龍寺)를 그동안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너무나 소홀히 취급해온 점과 무지(無知)를 우리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경북 경산은 전국에서 대학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학원도시로 대한민국의 인재양성(人才養成)의 보고(寶庫)요, 교육(敎育)의 요람(搖籃)으로써 글로벌시대의 필수언어인 영어를 전국에서 처음으로 공용화(公用化) 또는 상용화(常用化)를 실시 할 수 있도록 정부당국에 줄기차게 요구도 해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우리의 정신적 뿌리인 천년고찰(千年古刹) 반룡사복원사업(盤龍寺復元事業)에 대해 국가차원(國家次元)의 체계적인 실시추진계획(實施推進計劃)과 지속적인 재정지원(財政支援)이 뒤따라야 함을 꼭 명심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하기위해서는 국가지도자, 교육계, 문화예술계, 경제계, 언론계, 정치계, 법조계, 종교계 및 국민들의 관심(關心)이 더욱 요망(要望)된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인로(李仁老)가 반룡사(盤龍寺)에 들러 깊은 감명을 받고 지은 시(詩)


산거(山居)

春去花猶在 天晴谷自陰(춘거화유재 천청곡자음)
杜鵑啼白昼 始覚卜居深(두견제백주 시각복거심)

봄은 갔으나 꽃은 오히려 피어있고,
날은 개었는데, 골짜기는 절로 그늘지도다.
두견새가 대낮에 울음을 우니,
비로써 사는 곳이 산속 깊음을 알겠도다.


중국경제문화연구소대표 윤 종 식
(중국 북경)중앙민족대대학원 법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