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애왕을 황제라부르면 일본간첩이 됩니다
- 최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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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9-23 08:31
1910년 8월 29일부터 코리안 배달겨레가 나라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일본사람 총독이 서울에 와서 다스리게 되었다. 코리안 배달겨레는 나라잃은 사람이 되었다. 백성들은 조선사람으로 되었고, 왕은 일본귀족으로 흡수되어 리왕가(李王家)로 되었다. 조선사람이 부르는 이름과 일본사람이 부르는 이름이 서로 다르게 되었다.
1910년 8월 22일에 있었던 <실국조약>을 또 보기로 하자.
<일한병합조약>
제三조ː일본국황제폐하는 한국황제폐하 태황제폐하 황태자전하 병(竝) 기후예급(其后妃及) 후예(後裔)로 하야곰 각기(各其) 지위(地位)를 응하야 상당한 존칭위엄(尊稱威嚴)과 급 명예를 향유(享有)케 하고 차차(且此)를 보지(保持)함에 십분(十分)한 세비(歲費)를 공급함을 약(約)함.
제四조ː일본국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에 한국황족 급(及) 후예에 대하야 각 상당한 명예 급(及) 대우를 향유케 하고 차차(且此)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함을 약(約)함
비애왕(悲哀王)과 치루왕(恥淚王)에게 엄청난 돈을 주겠다는 것과 존칭하고 위엄을 유지하도록 보장하겠다는 왜왕의 약속이 3조와 4조로 되었다.
<조선이름>···················<일본이름>
비애왕ː悲哀王.................덕수궁 리태왕ː德壽宮 李太王
치루왕ː恥淚王.................창덕궁 리왕昌德宮 李王
비애왕자강ː悲哀王子堈................강공ː堈公
비애왕자희ː悲哀王子熹................희공ː熹公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리씨조선(李氏朝鮮)으로 부르라 하고, 조선시대(朝鮮時代)를 리조시대(李朝時代)로 부르라고 했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실국(失國)에 마지막 책임자는 덕수궁 리태왕이다.
자결할 기회가 다섯 번이나 있었다. 이등박문이 행한 을사늑약(1905) 때가 왕이 자결했어야 할 그 첫 번 째 기회였고, 이등박문이 대안문(大安門) 현판을 내리고 그 자리에 대한문(大漢門)이라는 현판을 걸었을 때(1906)가 왕이 자결했어야 할 그 두 번 째 기회였고, 이등박문이 선위하지 않으면 죽이려고 했을 때(1907)가 왕이 자결했어야 할 그 세 번 째 기회였고, 이등박문이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덕수궁(德壽宮)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을 때(1907)가 왕이 자결했어야 할 그 네 번째 기회였고, 경술실국(庚戌失國) 때(1910)가 자결했어야 할 그 다섯 번 째 기회였다.
비애왕이 밥과 반찬이 그리워 죽지 아니하다가 왜왕이 리태왕으로 부르게 되었다. 왜왕으로부터 많은 돈(歲費)를 받게 되었다. 자결하지 아니하고 살았던 것이 잘 생각한 일이라고 여기면서 일본군복을 입고 살다가 1919년에 죽었다.
덕수궁 리태왕이라고 부르면 죽고 싶은 마음이 생겨야 할 터인데 도리어 기뻐하면서 사진을 자주 찍었다. 비애왕이라는 이름 사호(史號)는 참으로 알맞는 이름이었다.
비애왕의 아들 치루왕은 하루빈 안중근선생을 독한 손(毒手)이라고 했고, 이등박문을 문충공(文忠公)으로 시호했다. 실국을 공포한 뒤 치루왕은 실국기념사진을 찍었다. 한심한 왕이었다. 구제불능 왕이었다. 왕이 일본귀족으로 흡수되어 창덕궁 리왕(李王)으로 불리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던 것이었다.
배달겨레 백성만이 나라를 잃어버리고 자기집에서 방바닥을 치면서 통곡했을 뿐이었다. 이 글을 읽고도 비애왕을 <고종>으로 부르고, 치루왕을 <순종>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저능아로 구제불능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일본고정간첩으로 된다.
비애왕을 황제로 부르는 사람은 일본간첩이 틀림없다. 속국이 없는나라, 13년 뒤에 망한 나라였던 그 대한제국을 제국이라고 떠벌리는 사람은 사기꾼으로 된다.
이름이 그 실상에 맞아야 마음이 편하게 된다. 이름이 실상에 맞지 아니하면 억지로 된다. 이름을 바르게 하는 것을 정명학(正名學)이라고 한다. 정명학의 창시자가 공자였다. 공자학을 정명학이라고 한다. 이름이 뒤틀리면 만사가 뒤틀리게 된다.
공자 문도에 원로급에 자로(子路)가 있다. 자로가 스승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기다려서 정치를 하려고 합니다. 선생님은 무엇을 먼저 하시려고 합니까. 공자 말하기를 <반드시 이름을 바르게 하는 일을 하리다>라고 했다. 차이나말로는 <必也, 正名乎>로 되었다.(論語13).
자로가 말하기를 <선생님은 사정에 멀리 있습니다. 어찌 그 바르게가 나옵니까>라고 했더니 공자 말하기를 <야비 하구나 由야, 이름이 바르게 되지 아니하면 말이 억지로 되고, 말이 억지로 되면 일마다 뒤틀려서 이룩되는 것이 없게 되나니라>라고 했다.
1910년 8월 22일에 있었던 <실국조약>을 또 보기로 하자.
<일한병합조약>
제三조ː일본국황제폐하는 한국황제폐하 태황제폐하 황태자전하 병(竝) 기후예급(其后妃及) 후예(後裔)로 하야곰 각기(各其) 지위(地位)를 응하야 상당한 존칭위엄(尊稱威嚴)과 급 명예를 향유(享有)케 하고 차차(且此)를 보지(保持)함에 십분(十分)한 세비(歲費)를 공급함을 약(約)함.
제四조ː일본국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에 한국황족 급(及) 후예에 대하야 각 상당한 명예 급(及) 대우를 향유케 하고 차차(且此)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함을 약(約)함
비애왕(悲哀王)과 치루왕(恥淚王)에게 엄청난 돈을 주겠다는 것과 존칭하고 위엄을 유지하도록 보장하겠다는 왜왕의 약속이 3조와 4조로 되었다.
<조선이름>···················<일본이름>
비애왕ː悲哀王.................덕수궁 리태왕ː德壽宮 李太王
치루왕ː恥淚王.................창덕궁 리왕昌德宮 李王
비애왕자강ː悲哀王子堈................강공ː堈公
비애왕자희ː悲哀王子熹................희공ː熹公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리씨조선(李氏朝鮮)으로 부르라 하고, 조선시대(朝鮮時代)를 리조시대(李朝時代)로 부르라고 했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실국(失國)에 마지막 책임자는 덕수궁 리태왕이다.
자결할 기회가 다섯 번이나 있었다. 이등박문이 행한 을사늑약(1905) 때가 왕이 자결했어야 할 그 첫 번 째 기회였고, 이등박문이 대안문(大安門) 현판을 내리고 그 자리에 대한문(大漢門)이라는 현판을 걸었을 때(1906)가 왕이 자결했어야 할 그 두 번 째 기회였고, 이등박문이 선위하지 않으면 죽이려고 했을 때(1907)가 왕이 자결했어야 할 그 세 번 째 기회였고, 이등박문이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덕수궁(德壽宮)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을 때(1907)가 왕이 자결했어야 할 그 네 번째 기회였고, 경술실국(庚戌失國) 때(1910)가 자결했어야 할 그 다섯 번 째 기회였다.
비애왕이 밥과 반찬이 그리워 죽지 아니하다가 왜왕이 리태왕으로 부르게 되었다. 왜왕으로부터 많은 돈(歲費)를 받게 되었다. 자결하지 아니하고 살았던 것이 잘 생각한 일이라고 여기면서 일본군복을 입고 살다가 1919년에 죽었다.
덕수궁 리태왕이라고 부르면 죽고 싶은 마음이 생겨야 할 터인데 도리어 기뻐하면서 사진을 자주 찍었다. 비애왕이라는 이름 사호(史號)는 참으로 알맞는 이름이었다.
비애왕의 아들 치루왕은 하루빈 안중근선생을 독한 손(毒手)이라고 했고, 이등박문을 문충공(文忠公)으로 시호했다. 실국을 공포한 뒤 치루왕은 실국기념사진을 찍었다. 한심한 왕이었다. 구제불능 왕이었다. 왕이 일본귀족으로 흡수되어 창덕궁 리왕(李王)으로 불리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던 것이었다.
배달겨레 백성만이 나라를 잃어버리고 자기집에서 방바닥을 치면서 통곡했을 뿐이었다. 이 글을 읽고도 비애왕을 <고종>으로 부르고, 치루왕을 <순종>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저능아로 구제불능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일본고정간첩으로 된다.
비애왕을 황제로 부르는 사람은 일본간첩이 틀림없다. 속국이 없는나라, 13년 뒤에 망한 나라였던 그 대한제국을 제국이라고 떠벌리는 사람은 사기꾼으로 된다.
이름이 그 실상에 맞아야 마음이 편하게 된다. 이름이 실상에 맞지 아니하면 억지로 된다. 이름을 바르게 하는 것을 정명학(正名學)이라고 한다. 정명학의 창시자가 공자였다. 공자학을 정명학이라고 한다. 이름이 뒤틀리면 만사가 뒤틀리게 된다.
공자 문도에 원로급에 자로(子路)가 있다. 자로가 스승 공자에게 물었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기다려서 정치를 하려고 합니다. 선생님은 무엇을 먼저 하시려고 합니까. 공자 말하기를 <반드시 이름을 바르게 하는 일을 하리다>라고 했다. 차이나말로는 <必也, 正名乎>로 되었다.(論語13).
자로가 말하기를 <선생님은 사정에 멀리 있습니다. 어찌 그 바르게가 나옵니까>라고 했더니 공자 말하기를 <야비 하구나 由야, 이름이 바르게 되지 아니하면 말이 억지로 되고, 말이 억지로 되면 일마다 뒤틀려서 이룩되는 것이 없게 되나니라>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