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제대로 된 보도를 해주셨음 합니다..
- 피와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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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6-19 09:35
대구시장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풀뿌리 민주주의 지방자치제가 정착되어가는 가운데 민선3기 시장 임기가 마감되어갑니다. 그러나 대구경제는 여전히 바닥을 치고 있고 사회적인 차별과 소외를 당해온 건설노동자들의 피맺힌 목소리는 월드컵 응원의 함성에 묻혀버렸습니다.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중증장애인들은 활동보조인 조례제정을 요구하며 시청 앞마당에서 아우성치고, 이제까지 대구경제를 떠받치고 있었던 날품팔이 건설 일용직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라며 거리로 나온지 17일을 넘어 서고 있습니다.
날품팔이 막노동꾼이라 불리는 비정규직 건설일용 노동자들은 한 때 “건설산업의 도시”라고 불렸던 대구경제를 떠받치고 있었습니다. 섬유산업과 더불어 건설산업이 대구의 주력산업이라고 불렸을 만큼 대구 경제의 중심축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IMF이후 대구지역 건설업체의 연이은 붕괴로 해마다 건설노동자의 삶도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벼랑끝으로 내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온 대형건설 회사들이 대구지역의 아파트 분양시장을 독점하면서 아파트 분양가는 3-4년 사이에 눈덩이처럼 폭등을 거듭하였지만, 오히려 건설일용직 노동자들의 임금은 삭감되어 갔습니다. 대형건설 회사들은 신규아파트 분양가에 물가인상에 따른 임금인상분을 반영시켜 아파트를 팔아먹었지만, 분양가에 반영된 임금인상 금액은 정작 대형건설 회사의 정규직 직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비정규직 건설일용 노동자들은 하루 일당에도 미치지 못하는 노예와 같은 강제도급을 강요받으며 하루 6만원 7만원의 저임금을 받아야 했고, 직영처리나 일당의 보전을 요구하면 곧바로 해고되기 십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맨몸뚱이 달랑 하나, 집짓는 기술 하나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건설일용직 노동자들은 강요되는 강제도급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며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능 숙련도가 떨어지고 저임금으로 밀려들어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일년에 겨우 200여일 밖에 일을 하지 못하는 건설노동자들의 1년 평균수입은 158만원 정도입니다. 그러나, 평균 연령 47세, 평균 부양가족이 3.6인의 가장으로서 한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표준생계비에 턱없이 부족한 돈으로 살아가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마저 현장에서는 최초 일한 날로부터 2달 3달이 지나서야 겨우 첫 월급을 받는 상습적인 체불임금에 시달리는데도 노동청에서는 건설회사의 규정에 따라 지급하고 있어 처벌할 수 없다는 점과 도급제로 일을 하는데 무슨 노동자냐는 앵무새같은 말만 반복하며 건설노동자의 생존권 보호조치를 외면하고 맙니다. 사정이 이러할진데 퇴직금도 고용보험도 받지 못하는 건설노동자들에게 4대 사회보험이란 너무나 먼 이야기 일뿐입니다.
건설노동자들이 바로 이러한 자신들의 문제를 개선해보고자 지난 5월 12일 첫 교섭을 시작으로 해서 직접 고용당사자인 전문건설업체와 단체교섭을 진행하고 있지만 건설업자들은 사용자들의 교섭대표단으로서 대표성이 있는냐 없느냐는 자신들의 문제를 들어 교섭을 회피해왔습니다. 이후 건설노동조합에서는 5월 12일, 5월 18일, 5월 25일, 5월 30일 등 수차례의 교섭을 요구하였지만 단 한차례도 실질적인 교섭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급기야 단체교섭 자리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살기위해 건설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파업을 결정하고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노동청은 건설노동자가 체불임금 민원을 제기할 때는 노동자가 아니라고 회피하더니 파업도 들어가기 전에 불법파업을 운운하였고 대구지방경찰청은 파업에 동참하라고 호소하는 건설노동자들을 마치 폭력배처럼 매도하면서 건설현장에 노동조합이 나타나면 112에 신고하라는 협조문을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경찰청에서는 파업중인 노동조합 간부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심지어 전직 부위원장의 집까지 찾아가 연행하고 전격 구속하였습니다. 합법적인 집회신고를 내고 항의 집회를 갔던 노동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여 4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6월 12일 노동조합이 집회신고를 낸 수성경찰서 정문앞은 경찰들이 자리를 다 차지하고 항의집회하려는 사람들을 도로로 밀어 냈습니다. 수성경찰서는 도로로 밀려난 건설노동조합 조합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분말 소화기를 뿌려대며 곤봉과 방패로 내려 찍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맨손으로 경찰의 폭력에 맞선 50대 60대 노동자들이 젊은 전투경찰과 맞서는 것은 처음부터가 비교가 되지 않는 싸움입니다. 수성경찰서에서 두산현장까지 밀린 노동자들은 동료들이 맞아 앰플란스에 실려가는 것을 보면서 흥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언론에 보도 된 내용은 마치 건설 노동자들이 폭도로 돌변한 것처럼 보도되고 늙은 노동자가 20대 젊은 전투경찰과 맞서다 폭도로 몰려 8명에게 구속 영장을 청구하고 이중 7명을 구속시켰습니다. 대부분의 건설노동자들은 평생 처음 머리띠를 묶고 평생 처음 투쟁조끼를 입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이들에게 죄가 있다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면서 그저 주는대로 받고 시키는데로 일밖에 할 줄 몰랐던 순박한 노동자들이 체념하고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굶어 죽으나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 아니냐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정작 정치자금의 젖줄이 되는 건설업체들이 건설 현장의 관행이라는 이유로 불법다단계하도급으로 2중 3중으로 착취하고 불법용역과 불법파견으로 임금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범죄행위를 해도 노동부는 묵인하고 경찰은 방관하고 검찰은 오히려 범죄자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사회양극화가 극대화 되어가는 시점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도시 서민을 보호하는 것이 지방자치 정부의 중심사업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무원들도 자신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고, 학교 선생님들도 노동조합을 만들고 교수님들 연예인도 노동조합을 만들어 자신의 노동기본권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마당에 가장 힘들게 일하고 가장 부지런하게 살아온 건설 노동자들, 그러면서 가장 가난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건설일용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근로조건 개선과 최저 생계비를 보전하라고 하는 것이 마치 폭도로 내 몰리고 사회불안 요소로 전투경찰에 의해 진압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전투경찰에 매 맞아 4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수술을 받는 중상자까지 생기고 9명의 동료들이 구속된 상황에서 대부분의 옥외집회가 금지되고 찜통같은 아스팔트 거리로 나와 호소하는 처절한 상황을... 이제 이들의 눈물을 보고 이들의 고통에 귀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루에 2명이 죽어가는 건설현장, 1년이면 700여명의 건설 노동자들이 죽어가는 건설 현장에서 하루 일당이라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새벽부터 저녁 해떨어질 때까지 미친듯이 일에 매달려야 하는 비정규직 건설일용직 노동자들의 삶을 더 이상 외면하지 마십시오.
얼마나 더 많은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자들이 죽어가야 합니까?
우리의 요구는 소박합니다.
‣ 평균 47세의 건설노동자가 3.6인의 부양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생계비 보장
‣ 일한 월급을 매달 꼬박 꼬박 받고 싶다는 상습적인 체불임금 근절
‣ 불법다단계하도급으로 2중 3중 착취당하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것
‣ 노동기본권을 근본적으로 박탈하고 악용되는 “시공참여자 제도” 폐지
‣ 실업과 고용의 반복으로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건설노동자의 고용안정을 위한 대구지역 건설노동자 우선고용이 우리가 주장하는 5대 요구입니다.
2006년 6월 17일
대구경북지역건설노동조합 위원장
풀뿌리 민주주의 지방자치제가 정착되어가는 가운데 민선3기 시장 임기가 마감되어갑니다. 그러나 대구경제는 여전히 바닥을 치고 있고 사회적인 차별과 소외를 당해온 건설노동자들의 피맺힌 목소리는 월드컵 응원의 함성에 묻혀버렸습니다.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중증장애인들은 활동보조인 조례제정을 요구하며 시청 앞마당에서 아우성치고, 이제까지 대구경제를 떠받치고 있었던 날품팔이 건설 일용직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라며 거리로 나온지 17일을 넘어 서고 있습니다.
날품팔이 막노동꾼이라 불리는 비정규직 건설일용 노동자들은 한 때 “건설산업의 도시”라고 불렸던 대구경제를 떠받치고 있었습니다. 섬유산업과 더불어 건설산업이 대구의 주력산업이라고 불렸을 만큼 대구 경제의 중심축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IMF이후 대구지역 건설업체의 연이은 붕괴로 해마다 건설노동자의 삶도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벼랑끝으로 내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온 대형건설 회사들이 대구지역의 아파트 분양시장을 독점하면서 아파트 분양가는 3-4년 사이에 눈덩이처럼 폭등을 거듭하였지만, 오히려 건설일용직 노동자들의 임금은 삭감되어 갔습니다. 대형건설 회사들은 신규아파트 분양가에 물가인상에 따른 임금인상분을 반영시켜 아파트를 팔아먹었지만, 분양가에 반영된 임금인상 금액은 정작 대형건설 회사의 정규직 직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비정규직 건설일용 노동자들은 하루 일당에도 미치지 못하는 노예와 같은 강제도급을 강요받으며 하루 6만원 7만원의 저임금을 받아야 했고, 직영처리나 일당의 보전을 요구하면 곧바로 해고되기 십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맨몸뚱이 달랑 하나, 집짓는 기술 하나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건설일용직 노동자들은 강요되는 강제도급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며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능 숙련도가 떨어지고 저임금으로 밀려들어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일년에 겨우 200여일 밖에 일을 하지 못하는 건설노동자들의 1년 평균수입은 158만원 정도입니다. 그러나, 평균 연령 47세, 평균 부양가족이 3.6인의 가장으로서 한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표준생계비에 턱없이 부족한 돈으로 살아가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마저 현장에서는 최초 일한 날로부터 2달 3달이 지나서야 겨우 첫 월급을 받는 상습적인 체불임금에 시달리는데도 노동청에서는 건설회사의 규정에 따라 지급하고 있어 처벌할 수 없다는 점과 도급제로 일을 하는데 무슨 노동자냐는 앵무새같은 말만 반복하며 건설노동자의 생존권 보호조치를 외면하고 맙니다. 사정이 이러할진데 퇴직금도 고용보험도 받지 못하는 건설노동자들에게 4대 사회보험이란 너무나 먼 이야기 일뿐입니다.
건설노동자들이 바로 이러한 자신들의 문제를 개선해보고자 지난 5월 12일 첫 교섭을 시작으로 해서 직접 고용당사자인 전문건설업체와 단체교섭을 진행하고 있지만 건설업자들은 사용자들의 교섭대표단으로서 대표성이 있는냐 없느냐는 자신들의 문제를 들어 교섭을 회피해왔습니다. 이후 건설노동조합에서는 5월 12일, 5월 18일, 5월 25일, 5월 30일 등 수차례의 교섭을 요구하였지만 단 한차례도 실질적인 교섭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급기야 단체교섭 자리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살기위해 건설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파업을 결정하고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노동청은 건설노동자가 체불임금 민원을 제기할 때는 노동자가 아니라고 회피하더니 파업도 들어가기 전에 불법파업을 운운하였고 대구지방경찰청은 파업에 동참하라고 호소하는 건설노동자들을 마치 폭력배처럼 매도하면서 건설현장에 노동조합이 나타나면 112에 신고하라는 협조문을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경찰청에서는 파업중인 노동조합 간부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심지어 전직 부위원장의 집까지 찾아가 연행하고 전격 구속하였습니다. 합법적인 집회신고를 내고 항의 집회를 갔던 노동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여 4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6월 12일 노동조합이 집회신고를 낸 수성경찰서 정문앞은 경찰들이 자리를 다 차지하고 항의집회하려는 사람들을 도로로 밀어 냈습니다. 수성경찰서는 도로로 밀려난 건설노동조합 조합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분말 소화기를 뿌려대며 곤봉과 방패로 내려 찍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맨손으로 경찰의 폭력에 맞선 50대 60대 노동자들이 젊은 전투경찰과 맞서는 것은 처음부터가 비교가 되지 않는 싸움입니다. 수성경찰서에서 두산현장까지 밀린 노동자들은 동료들이 맞아 앰플란스에 실려가는 것을 보면서 흥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언론에 보도 된 내용은 마치 건설 노동자들이 폭도로 돌변한 것처럼 보도되고 늙은 노동자가 20대 젊은 전투경찰과 맞서다 폭도로 몰려 8명에게 구속 영장을 청구하고 이중 7명을 구속시켰습니다. 대부분의 건설노동자들은 평생 처음 머리띠를 묶고 평생 처음 투쟁조끼를 입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이들에게 죄가 있다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면서 그저 주는대로 받고 시키는데로 일밖에 할 줄 몰랐던 순박한 노동자들이 체념하고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굶어 죽으나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 아니냐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정작 정치자금의 젖줄이 되는 건설업체들이 건설 현장의 관행이라는 이유로 불법다단계하도급으로 2중 3중으로 착취하고 불법용역과 불법파견으로 임금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범죄행위를 해도 노동부는 묵인하고 경찰은 방관하고 검찰은 오히려 범죄자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사회양극화가 극대화 되어가는 시점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도시 서민을 보호하는 것이 지방자치 정부의 중심사업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무원들도 자신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고, 학교 선생님들도 노동조합을 만들고 교수님들 연예인도 노동조합을 만들어 자신의 노동기본권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마당에 가장 힘들게 일하고 가장 부지런하게 살아온 건설 노동자들, 그러면서 가장 가난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건설일용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근로조건 개선과 최저 생계비를 보전하라고 하는 것이 마치 폭도로 내 몰리고 사회불안 요소로 전투경찰에 의해 진압되어야 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전투경찰에 매 맞아 4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수술을 받는 중상자까지 생기고 9명의 동료들이 구속된 상황에서 대부분의 옥외집회가 금지되고 찜통같은 아스팔트 거리로 나와 호소하는 처절한 상황을... 이제 이들의 눈물을 보고 이들의 고통에 귀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루에 2명이 죽어가는 건설현장, 1년이면 700여명의 건설 노동자들이 죽어가는 건설 현장에서 하루 일당이라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새벽부터 저녁 해떨어질 때까지 미친듯이 일에 매달려야 하는 비정규직 건설일용직 노동자들의 삶을 더 이상 외면하지 마십시오.
얼마나 더 많은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자들이 죽어가야 합니까?
우리의 요구는 소박합니다.
‣ 평균 47세의 건설노동자가 3.6인의 부양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생계비 보장
‣ 일한 월급을 매달 꼬박 꼬박 받고 싶다는 상습적인 체불임금 근절
‣ 불법다단계하도급으로 2중 3중 착취당하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것
‣ 노동기본권을 근본적으로 박탈하고 악용되는 “시공참여자 제도” 폐지
‣ 실업과 고용의 반복으로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건설노동자의 고용안정을 위한 대구지역 건설노동자 우선고용이 우리가 주장하는 5대 요구입니다.
2006년 6월 17일
대구경북지역건설노동조합 위원장